『재처리 시대, THỜI TÁI CHẾ』애 대한 에세이 - 장수말벌과 빗방울에 대한 감상(鑑賞) - 고형렬

『재처리 시대, THỜI TÁI CHẾ』애 대한 에세이

장수말벌과 빗방울에 대한 감상(鑑賞)

 

 

 

 

 

 

 

 

 

 

고형렬

 

 

 

적중(的中) 화두

 

재처리의 본의는 사용후핵연료(혹은 핵쓰레기) 다시 에너지와 물질 등으로화학 처리하는 근대과학의 핵심기술이다. 상징적인 플루토늄은 자연 속에 없는 물질이지만 공기 중에서 노란색으로 변색하는 은색의 금속이다.

 

미래 과학의 헤게모니는 사용하고 버려지는 물질은 없다는 명제를 내걸고 재처리 논리를 강화하며 경제주체인 인류의 소비자를 유혹한다. 파손 물질분자의 소멸을 인정하지 않고 무한 재처리를 강요하는 욕망의 반복은 인간을 물질과 다르지 않는 동일성에 배치하면서 틈이 없는 강압의 기제로 작용해간다.

 

정신이 거처하는 곳이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의 유기체 역시 재처 이론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이 자신들의 결핍과 욕망에의 예속화를 끈질기게 요구한다. 물질의 피곤은 정신의 황폐화를 불러온다. 그곳으로부터 가짜 명상과 허구적 선정(禪定) 계속 부름을 받고 이용될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해졌을 시인은 침묵하거나 응시하고 귀를 기울인다. 어디선가 정신과 물질의 악취가 풍겨온다. 피로감은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시고 등짝은 폭양에 노출된다. 세계는 재처리 이전의 물질과 정신으로 돌아올 없다. 끝없는 위안과 도피를 강요당하면서 타락한 정신의 매너리즘에 빠져든다.

 

시인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삼십 년이 흘러간 세계화 속의 자연과 인류는 매력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너무 노후했다. 세대가 지나가기 전까지 만년설은 이미 녹아 없어지고 북극곰은 모두 죽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가 밝다고 하는 과학과 정치의 말들은 외적 착각이며 인간중심주의의 환상이다. 인간의 모든 것이 잘못 작동되고 있다는 인식만이 덜컹이는 우주 궤도를 다시 쳐다보게 한다. 어느 곳에서도 시와 빗방울 같은 작은 희망을 엿보기가 어렵다. 암울한 거시문명에 대한 불가역의 예후는 이미 현실 깊숙한 곳에 못을 박고 예언자들은 떠났다.

 

냄새도 없고 색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금세기 초의 바이러스가 문명이 도달한 세계화의 시스템과 궤도를 정지시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다. 인류가 쌓아온 문명의 지혜와 윤리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발발이 던져준 공포와 어둠에 언어의 실뿌리가 닿아 있는 마이반펀(Mai Văn Phấn) 서사시 재처리 시대, THỜI TÁI CHẾ는 자전 기억을 담당하는 편도체(扁桃體)의 자유공간에 분석과 치유가 불가한 고통과 희망을 기록하고 있다.

 

어떤 언어는 과거를 잊기 위해 고투하지만 다른 언어는 과거를 찾기 위해 고투한다. 그것은 모든 삶의 굴레 속에서 마디와 옹이가 된다. 그곳에서 성장하지만 시인은 시적 인간으로 살아가면서도 역사적이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들은 고통의 중심에서 시대와 삶을 재현하려 하기 때문 고통스러운 시간에 스스로 갇힌다.

 

모두가 하나의 목표 안에 들어갔을 이미 사회는 새로운 중심과 치열한 경쟁 구도의 시장과 논쟁을 만들어간다. 무한 경쟁을 유도하는 사회 속에서 기회의 불평등과 도태적인 방치, 소외, 단절은 심화되고 이미 다른 시간의 창고에 버려진 시적 슬픔과 죽음의 주제는 망각되거나 쓰레기가 되었다.

 

예측 불가한 재처리 시대 속으로 우리는 편입되며 뒤늦게 그것을 노래하고 비평적 언어와 기술을 찾아 자아를 잃거나 갱신하려 한다. 어느 쪽이든 찢어짐과 비애, 슬픔을 자아낼 수밖에 없지만 우리 모두 낯선 자아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아무런 의심을 가지지 않는 익숙해진다.

 

잔혹했던 전쟁이 개인의 내면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와 아수라장이 되던 마을을 시인은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어떤 정황의 정지(停止) 모든 문제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내부의 문제를 탄생시키는 종결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베트남의 꿈을씨앗으로 압축하고 확장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인연이 있었다

 

고형렬은 한국전쟁이 정전된 이듬해인 1954년에 태어났고 마이반펀은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1955년에 태어났다. 아시아의 전쟁은 고통의 묘사와 기억, 죽음과 삶의 분리라는 시대구분의 강을 남겼다. 시인의 내면 깊은 곳에 해독이 불가한 음각의 상처를 남겼다.

 

전에 서울과 속초에서 · 아세안 시인 문학축전(Korea-ASEAN Poets Literature Festival) 개최할 그를 초청하여 설악산과 군사분계선을 안내한 적이 있다. 인연으로 지난해에 그와 함께 이인 시집 『대양의 쌍둥이』를 간행했다.

 

시인은 작년 가을에 한국문학번역원의 초청으로 와서 서울의 한복판에서 재처리  시대, THỜI TÁI CHẾ의‘제2장 진홍색’의 일부를 낭독했다. 한 편의 장시를 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낭독 시가 바로 그 서사시의 일부임을 알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항상 소란한 한국의 시공간을 순간에 조용하게 만든 그의 음유를 귀속에 담았다. 조용하고 날카로운 시의 목소리가 󰡐나는 베트남의 시인󰡑이라고 외친 그의 온몸에서 사랑의 언어로 터져나왔다.

 

진지하고 솔직했고 긴박하고 곧았다. 작고 단단한 얼굴은 조각된 시인의 초상으로 각인되기에 충분했고, 가느다란 명주실 같은 빛을 그는 부끄러운 받아들였다. 거기 있는 그의 옷에서 베트남의 빗소리가 반짝이는 듯했다.

 

그가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나서 얼마 , 『재처리 시대, THỜI TÁI CHẾ 의 베트남어와 영문(그때 이 작품은 영국에서 출간되어 있었다) 원고가 나에게 도착했다. 나는 곧장 베트남어와 한국어 번역(안경환 교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시는 나에게 인도차아나반도의 동쪽에서 남북으로 길게 내리뻗은 아름다운 베트남의 북부지방에 거주하는 시인의 정신적 신화를 환기시켰다. 마이반펀의 영혼이 담긴 편의 주술로서 그의 영육이 권의 시집으로 제책(製冊) 같은 아픔이 전해졌다. 영혼의 피를 쥐어짠 것을 금방 느낄 있었다.

 

작품은 상실과 후회와 망각 그리고 기억이 교차하는, 그래서 그가 마치 어떤 시대의 폭포 아래에 혼자 있는 같은 인상을 주었다. 갑자기 저쪽 숲속에서 떠오르는 햇살들에 놀란 아침의 새들이 우짖는 같았다.

 

어쩌면 전편은 그의 새파란 울음이고 아픔이고 꿈이다. 기이하게 소리는 확산된다기보다는 안으로 응집되면서 없는 길을 나서는 새로운 불안과 슬픔을 고조시켰다.

 

그의 언어는 날개처럼 날카롭고 물처럼 부드럽고 투명하고 바람이 부는 수면처럼 자유로울 아니라 가볍다. 마치 초췌한 청년이 나에게 다가와 조용히 들려주는 자기 생의 고통과 꿈의 이야기처럼 들려왔다.

 

작품의 언어와 구조는 여러 각도에서 분석되어져야 것이다 왜냐하면 시가 미래에서 비추는 어떤 불빛 같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수박을 껴안고서 깨지를 못하는 사람처럼 전체적 부분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작품이 지닌 위의와 기의(의미) 남겨두고자 한다. 그래야만 마이반펀의 언어 자체가 어둠속에서 뜨겁게 무엇인가를 ()재처리될 것이라 믿는다.

 

다시 말하지만 내밀하게 안으로 긴장하면서 밖으로 확장하는 사유의 탄력성은 매우 인상적이다. 모더니즘이 갇힌 권태, 헛됨, 반복성 등의 부정적 요소를 그의 시는 치열한 갈망으로 대치하면서 극복하고 있다.

 

특히 일상성에 갇힌 세계의 한계와 안타까운 삶의 일상성을 경험하면서 다른 이월(移越) 꿈꾸는 시인의 정신적 단련은 그가 이미 지구적 사유의 중심에서 사유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시가 잃어버린 아름다운 잠언과 메타포, 유머, 정갈함 등의 소중한 정신과 태도를 재현한 시가 감추고 있는 주제는 사실 재처리의 다른 희망에 있다. 어떤 조합과 해체를 거쳐 새로운 물질(언어) 찾는 연금술사는 자신을 재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화학적 재처리와는 구별되는 문학의 개안(開眼)이다.

 

그는 아무도 가지 않는 고독한 언어의 길을 먼저 떠났다.

 

  

다른 시간으로의 약속

 

인물이 대극을 이룬다. 사람은 25보병사단 소속으로 1975 4 28 동주(Đồng Dù, 사이곤에서 60km 서북쪽) 지에서 부상당해 사망한 남베트남군이다. 다른 사람은 T54탱크를 몰고 부대 문을 열고 진입하려다 탄에 부상당하는 베트남인민군 320A사단 C5소속의 인물이다.

 

체제의 인물이지만 통일되면서 영혼은 현재의 베트남민주공화국에 소속된 영혼들이다. 사람을 불러내면서 시는 45 전의 시대의 대립을 복기된다.

 

시인은 전쟁이 끝나던 1975(통일의 ) 죽었다는 일등하사의 죽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해는 1960년에 미해군 구축함과 북베트남의 경비정 사이의 전투에 의한 통킹〔동경(東京)〕만 사건으로 시작한 2 인도네시아전쟁이 끝나는 해이다. 시인은 뒤이은 1979년의 중국과의 전쟁의 일화를 이곳에 남기고 있다.

 

마이반펀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역사와 과거의 미망(未忘) 두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아직도 누군가의 고루한 정치학 강의를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수도 자신이 어디 있는지 교안(敎案) 잊고 자기 정체성과 희망을 잃어버렸다.

 

아직 초탈하지 못하고, 어디선가 헤매고 있는 줄을 알고 있으니까요 모두가 거기에 아직 머무르고 있지는 않나요?” 주시할 문장이다. “나는 위에 올라와, 숨을 쉬고 있어요. 입언저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어머니 대지를 적십니다.” 암시가 이미 작품의 전반(全般) 관통하는 복선이다.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그들과 대지 위에 나와 숨쉬는 모두의 나는 하나이며 새로운 언어의 희망들이다. 여기서 세계 혹은 베트남 현실 속에 갇힌 시인의 작은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들려온다.

 

그것은 차라리 비명이라 있다. 대지에 피를 적시는 것은 시인의 입언저리에서 흐르는 바로 언어의 파편들이다. 피는 쉽게 정의되고 강제할 없는 것으로서 끝없는 자기 변화를 욕망한다. 격랑 속에서 휩쓸려가는 시인의 아름다운 피의 노래가 가슴 속에서 흘러나온다.

 

화자와 시인은 분리된 자아로서 자신의 성장과정을 아주 복잡하게 진술한다. 그만이 고통 속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진술과 고백, 반성과 지향은 그의 삶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급우 시절에 들은 선생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을 알아야 한다.”

 

어느 사회나 열린사회 같아도 닫힌사회이며 닫힌사회 같아도 열린사회이다. 시인은 지금 심각한 폐쇄회로에 갇혀 있는 자기 갈증을 전언(傳言)한다. 여기서 심장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시 새로운 윤리와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요구하는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제지를 당했습니다. 주머니를 찾아 기간 만료된 서류뭉치들만 뒤적거렸습니다. 나는 갇혔고, 막다른 골목이었습니다. 말을 못하게 금지당했습니다. (중략) 극심한 난관이었기에 나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차가운 안개가 열린 창문으로 들이칩니다. 나는 누워서 다른 꿈을 기다립니다.”

 

적어도 나는 부분을 전율적으로 읽어야 했다.

 

하이퐁의 집필실에서 나온 문장은 베트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신 속에도 파장을 일으켰다. 󰡐다른 󰡑 대한 무섬증은 실존의 불안으 몰고 수도 있지만 바로 여기서 지평과 경계에 서는 시인이 지난한 모습을 엿볼 있다.

 

새로운 길을 암시하는 의미형성의 현실반영이라고 생각할 마이반펀 베트남 시민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시인이다.

 

 

점검의

 

1 〈관점〉에서부터 대미까지 긴장감 있게 언어의 추상성과 구체성이 병치되어 있다.

 

내일 다시 기억되고도 남을 시의 아름다운 대화들은 현재의 열정을 다시 찾아 길을 떠나는 자들에게 거울이 되고 있다.

 

다만 그의 사회 혹은 () 의식의 권태와 나태, 통제, 답습을 두려워할 뿐이다. 그래서 2 〈진홍색〉에서기억이 돌아와 잊었던 과거를 찾았습니다라고 말한다. 기억회복은 파도 속에서 등대와 같은 좌표와 위로가 된다.

 

3 〈무대〉 1막에서는여전히 같은 꿈입니다라고 다른 시간으로 문을 뒤에, 3막에서그렇게 단순할 뿐인데 (중략) 그때 많은 관객들이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관객들은 아직 자라지 못한 물고기가 낚시 바늘을 것을 안타까워했고, 깃털이 갓난 새끼 새가 그물에 걸린 것을 애석해했습니다.”라고 시인의 비밀 무대를 공개한다.

 

시구는 시집의 절정을 이룬다. 어두운 희망보다 밝은 절망의 문장은 섬세한 심경을 비추는 빛나는 대목이다.

 

            -  악의 발톱에서 멀리 벗어났으니, 자기야 걱정 !

            -  우리를 따라오는 사람 누가 있나요?

            -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피의 길을 걷고 있어.

                           (중략)

            -  모든 것의 형태는 변하고, 안에서 비틀려져요.

            -  그것을 파괴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  오빠는 정의가 있다는 것을 믿어요?

               - 제4장 〈교차로〉 부분

 

󰡐파괴할 방법󰡑 󰡐정의󰡑 제시하는 여자와 남자의 대화는 현재로선 의미심장하다. 시대의 고비마다 곳곳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삶이고 역사 말을 상기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한정된 길을 것이다.

  

우리를 따라오던 시간은 사라지고 다른 소년들이 길을 이어 길을 과거의 서사처럼 따라갈 것이다.

 

 

6 (갈망의) 대화

 

내가 거처하는 곳으로 곧장 들이닥칩니다. 그는 손에 펴져 있는 책을 낚아채고는 머리카락을 잡고 뒤로 제치고 얼굴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리고는 표지를 자세히 보고 나서야 나를 서서히 풀어줍니다. 무엇인가를 착각했나? 도살자는 분명 누군가를 추적해서 납치를 원하는 것입니다.”

 

위의 5 도살자의 논변을 거쳐 6 〈대화〉로 건너간다.

 

                    -  아직도 당신은 그것을 신봉하나요?

영원히 믿습니다.

혹시 내가 믿음을 있겠소?

고동색 흙과 파란 풀을 보시오.

풀잎 끝을 가까이 당겨보리다.

                    - 6 대화 1 부분

 

여기서고동색 흙과 파란 가까이 당겨보는풀잎 마음속에 물든다. 형상은 날카로운 울음을 간직한 음표와 같다.

 

몇몇 나약한 듯한 생명을 발견하는 그들의 시적 화답은 매우 인상적이고 공명적이다. 사회에 던지는 마지막 시적 예언과 유언처럼 들린다

 여기서 마이반펀의 시가 추구하는 외연이 적극적으로 감지되면서 다른 언어의 꽃을 피우려고 한다. 가녀리나 곡진함이 넘친다. 〈갈망의 대화〉는 재처리 같은 것과는 대적의 관계에 놇인다.

    

나는 1941 말에 죽임을 당했어요.

어디에서요?

바로 자몽나무 밑둥치에서요

누가 당신을 죽였지요?

프랑스 밀정과 함께 지역책임자가요.

그때 무엇을 소지하고 있었나요?

깃발을 지니고 있었지요.

당시에 누구에게 주려고 했었나요?

                    - 6 대화 1 부분

 

죽음은 항상 시인에게 질문을 남기고 다음의 시구를 얻게 한다. 죽음의 말을 듣고 싶지만  그곳이 어디 있는지는 시간만이 알고 있다.

 

       - 물방울마다 모두 목소리를 권리가 있습니다.

                    (중략)

       - 나는 모든 선택을 존중합니다!

       - 6 대화 5 부분

 

 여기서 그의 시가 모든 생명이 지닌 개성과 선택을 존중하고 지향한다는 언어의 플래시가 어둠속에서 비로소 반득 켜졌다. 본질적인 것을 지키려는 아이콘의 불빛을 독자들은 들여다보면서 교감하게 것이지. 하지만모든 선택을 존중하고’‘물방울마다 모두 목소리를 권리가 있는사회가 실현된 적은 없지만 시인의 언어 속에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존속하고 있다.

 

어떤 개인들은 희미하지만 고요한 진실의 불빛 하나만으로도 길을 있으며 그래서 아마도 멀리 있는 사람들은 플래시 속에서 빛을 발산하는 홍채와도 같은 작은 필라멘트를 기억할 것이다.

   

 

7: 모델의 문제

 

〈모텔〉 3 통하여 그는 절망한다.

 

나는 이웃사람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아침에 영감은 보통 오토바이를 타고 일터로 갔다가 오후가 되면 반대로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나는 영감을 따라가 그의 행동거지를 자세히 기록하곤 하였습니다.”

 

감시의 끈은 어느 사조직과 공동체 안에도 존재하는 잔상이다. 어떤 인물은 기회적 향락의 이데올로기로 도시의 골목과 자기폐쇄회로의 골방에서 자신의 늙음과 , 좌절과 소음을 외면한 망상 속을 떠돌며 도시 속에 잠든다.

 

욕망과 경쟁으로 밀집된 사회는 끝없는 허무의 희망을 낳으면서 가파른 절망의 고도를 양산한다. 분산된 지식인과 날카로운 시인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으면서 어디선가 물은 비등(沸騰)하고 본능의 손들은 어느새 대세(大勢) 편리로 쫓아 가버린다.

 

굴삭기와 고층빌딩사회는 인간 내부의 오랜 시간을 지워버린다. 어떤 시스템도 자기 숙명의 사슬을 풀지 않은 적이 없지만 다시 구련(拘攣) 묶인다. 때로는 견고한 같은 사회가 풍랑 속에 있는 척의 배보다 불안하다.

 

이제 시인은 멀리 꿈의 광환(光環) 내다보면서 다른 불의 대문을 통해그곳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나서지만 온몸이 불에 타고 수염과 머리카락은 남지 않았다. 광환의 뒤에는 단지 황무지뿐이다.

 

쥐들은 죽었고, 좋게 살아남은 마리가 달려 나와 반긴다. 그로부터 나는 왕국의 왕이 된다. 들은 지하실과 땅속의 쥐가 되었.

 

그는 나무에서 많은 다른 결실을 얻을 있도록 북쪽의 감귤, 용안육, 레몬, 살구 등과 남쪽의 자두, 망고, 람브탄, 잭후르트(jackfruit), 자몽 등을 교배시키는 공상과학 연구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껍질 색을 내부와 부합하게 변화시킬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마이반펀의 정신은 굳어진 감각을 깨우고, 예후를 민첩하게 반영한다. 그는 간단한 문장을 명확하게 읽는 법을 배우고 조국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매우 빠르게 사유하고 조사하고 감각하면서 베트남의 현재를 관통하고 있다. 그는 어쩌면 이미 미래로 가버린 시인이다

 

  

장수말벌과 빗방울의 희망(?)

 

마침내 그는 9 〈속편〉에서다른 가치를 추구합니다. 다른 노선을, 철학을. 다른 분기점을. 다른 신상(神像). 다른 모형을. 다른 독립을. 다른 자유를. 다른 행복을. 다른 의지를. 다른 감정을.” 갈망하기에 이른다.

 

이곳에재처리 주제어가 등장한다.“바늘풀꽃이 오랫동안 침묵했다가 이제야 갑자기 스크린의 왼쪽 모퉁이에 출현했습니다. 바이러스에 오염된 컴퓨터가 경고음을 내듯 진동음을 방출합니다. 우리는 재처리 시대를 지내왔다!”

 

충격적인 발언이다.

 

그러한 신호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지도 어리벙벙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기본물질도 아니고 원재료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야 말이 많기 때문에 그는 말을 멈출 수가 없다. 원재료를 거듭 거듭 재처리하면서 물질과 인간의 영혼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재처리 후의 괴이한 물질은 반지구적이며 반시적인 것이다.

 

그들은 영혼을 보장해주면서 재처리 물질화한 망가진 영혼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푸집과 영혼 없는 우거(寓居) 되었다. 어느새 인간의 내부는 물자체를 인식할 없는 전혀 다른 것들로 가득 들어차 있게 되었다.  

먼지로 뒤범벅인 채로 있는 플라스틱 통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그들 모두가 분류되어 소각되거나 재처리되기 위해 집결지로 모입니다.”

 

이곳에서 시는 대전환의 문을 열어젖히고 마지막 종결로 향한다. 그는  폐쇄적 수사의 풍자에 멈출 것인가, 아니면 절망의 정치적 아이러니에 다다를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시간과 서사의 문제로서 당자(當者) 문제는 아니다

 

구멍 안에 있던 장수말벌이 갑자기 스크린에 출현해 문을 열고 아직 암호를 해독할 없는 희귀한 자료를 읽을 있는 메모리 창으로 들어갑니다. 이제는 장수말벌이 문제해결의 실마리이자, 혈자리요, 만능열쇠.”

 

이들이 모든 영혼과 양심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다.

 

시인은 이곳에 희망을 남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장수말벌이었다! 그때부터 문명의 구토가 시작되는 잠시의 혼란을 일으킨다.

 

숯검댕이 망령들은 도살장, 쓰레기처리공장, 화장장의 좁은 굴뚝을 기어 나오려 곤욕을 치릅니다. 그들은 비현실적인 이상과 불완전한 꿈을 함께 가지고 나옵니다. 때마침 이른 소나기가 퍼붓습니다. 망령들이 어머니 땅위 쏟아지는 깨끗한 빗방울에 방울마다 뒤섞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망령일 뿐이다.

 

어느 이른 아침에 물살을 거스르며 헤엄치는 물고기 마리, 하나 깜박이지 않고 동트기만 기다리는 개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급우(級友) 시절의,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미완의 꿈이다. 그렇다, 시인이여, 우리는 알지. 꿈이 실현되면 언제나 다른 일상의 권태가 오고 나태한 제도가 모두를 장악하며 영혼의 언어는 부패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역시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만, 그것이 우리 내부를 통과할 때에만 우리도 새로운 절망과 희망을 얻곤 했다. 그렇지만 이곳의 재처리란 말은 공포의 언어이고 망각의 기술이다.

 

재처리된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아니다. 주체화는 어떤 이념구조와 문명체제 속에서도 이미 가능하지가 않다. 시대는 우리를 역사 속에 남기고 지나갈 뿐이다. 버려지고 남아 있는 우리 자신들이 주제이다.

 

이곳에서 이슬방울과 풀잎이 보인다. 그의 시는 영겁을 욕망하고 물질을 항구적으로 재처리하려는 망상을 가지는 것에 대한 대비(對比)로서 세계에 생태적 구원의 종언을 표명한다.

  

나의 영혼을 깨워주는 것은 마지막 언어는소나기소리이다. 나에게 남겨 치유의 말은 스크린에 나타나는 문명의 장수말벌이 아니고빗방울의 마음(초심)’이었다.

 

고형렬에게 보낸 마이반펀의 2019년의 편지를 인용한다.

 

서사시를 (산문의 ) 나는 1장에서 9장으로 이어지는 피의 강을 상상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오직 강만이 있을 뿐이다. 강은 어디든 흐르고 있어서 당시 베트남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깨워냈다.”

 

쉼이 없이 변화를 향해 따라가는 것을 물질과 에너지의 본질과 현상으로 정착시키려는 고에너지물리학의 교차이론은 빗방울의 음악 소리와 같은 것일 있을까. 쿼크에 도달하려는 과학적 사유가 허무의 목표와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훼손되는 물질 속에 있는 우리 영혼은 어떻게 처리되고 구원될 있을까.

 

마이반펀 시인과 함께 하롱베이의 없는 우거(寓居)에서 호치민 시내까지 내리는 비를 내다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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